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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사람은 최대한 버티고 그래도 칭찬받을 업적을 하나라도 이룬 사람이 먼저 가는군요. 김영삼 사망 기사를 보니 참 기분이 묘합니다. 그가 항상 ‘삼당합당’으로 까이긴 하지만 ‘하나회 숙청’,’총독부 폭파,’금융실명제’ 등 업적을 논할거리라도 있는 몇 안되는 대통령 입니다.

치킨 앤 마우스의 경우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칭찬해줄 것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지요. 그래서 인지 김영삼 서거 발표 이후에 최근 대한민국 대통령과 비교되며 오히려 많은 애도를 받고, 그에 대한 비난 보다는 좋은 평가들 위주로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봅니다.

 



‘김영삼 사망 원인’은 혈앨 감염이라고 합니다.

물론 1927년생이라는 나이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11월 19일에도 열이나서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었고, 이틀후 상대가 많이 악화되어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가 결국 오늘 11월 22일 0시 21분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임기 기간은 1993년~1998년 이었으며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은 향년 8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故김영삼 전 대통령’은 남자다운 기질이 있었습니다. 과거 1970년 9월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었는데, 쿨하게 무대위로 올라와서 손을 잡아 함께 들어올리며 대선 기간동안 그를 적극 도울것을 약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젊었을 당시 김대중,김영삼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총독부 건물 해체 입니다. MB때 부터일까요. 일본 눈치보고 사는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 현실을 비추어 보면 일본의 ‘간곡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강행했던 저시절이 그리워지는것 같습니다.

군부의 날이 시퍼렇게 서있던 시절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면서 23일간이나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었고, 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그의 대담함이 빛을 발하기도 하는데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숙청은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대단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김영삼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것이라는게 다수의 의견 입니다.

 

 

숙청이 이루어지던 날까지 최측근인 비서진들까지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라니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지요. 만약에 그때 단칼에 모든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대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지 못했을거라는 말에 저도 동의 합니다.

그만큼 상당한 권력 이너서클이었고, 뿌리가 상당히 깊었기에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엄청난수의 ‘별’들의 목이 날아가버리고. 육군출신들의 장성들이 한꺼번에 숙청당하다시피 나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공군 출신 합참의장, 국방부장관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하나회란?

1951년 첫 육사 입학생 중에서도 '영남 출신'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5명이 만든 '5성회'가 시초였으며, 후에 눈치빠른 전두환이 5.16 군사정변(박정희 대통령을 만들어준..) 지지하면서 관심을 받은것이 기반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절대복종의 서약 절차를 거치며 가입이 이루어지며, 서로 경쟁하지 않고 밀어주고 끌어주며 권력의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차지하게 됩니다.

특히나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고 난 뒤에는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 군 내에서 차지할 수 있는 주요 자리는 모두 차지하고, 후에 장관과 국회의원까지 나왔을 정도.

 

그리고 금융실명제의 경우에는 검은돈을 양성화 시키고, 우리나라 경제 시스템을 선진화 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한 ‘사건’ 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신분증을 가지고 본인 명의의 통장만 만들 수 있는것이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지만,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차명 계좌 뿐만이 아니라, 익명, 가명 계좌도 가능했었습니다. 부정부패, 비리, 탈세가 득세했던 시절을 깔끔하게 날려버린것이 금융실명제 입니다.

 

김영삼 답게 ‘속전속결’ 이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에 ‘있는 분’들은 아주 난리가 났었습니다. 부랴부랴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지요. 김영삼이 대선때 공약으로 이야기 했을때만 하더라도, 이게 현실화 될거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 홍재형 재무부장관 둘을 불러서 극비리에 시작했고, 만약에 정보가 새어나가면 둘부터 날려버리겠다고 이야기 한뒤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금융실명제를 비밀리에 진행하던 특별팀은 한달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진행되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해서 꽤나 강경했습니다.

그가 둘째아들 김현철에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잘 들어봐래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본보기로 잡은 게 며느리였다카이.

정치권에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개석이가 집을 급습해가 수색을 했더니 실제로 엄청난 양의 보석이 나왔다는 거 아이가.

그 날 이후 장개석이 며느리를 불러가(불러서) '이게 마지막 식사'라며 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아나. 권총인기라 권총."

긴급명령권을 발동해서 발표와 동시에 실시 되었고, 실명확인 없이 돈을 뺄 수 없게 만들어버리며 3천만원 이상 인출할 경우에는 자동으로 국세청 통보와 함께 조사가 들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지옥문’이 열렸다고 할정도로 큰 혼란이 왔었지만 김영삼의 금융실명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을 것 입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사하고 구속시키는 등 역사바로세우기에도 힘썼으며,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는 등 환경쪽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는 공적도 있습니다.

인간적이기도 하고, 한국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을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사망을 애도하며 글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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